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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dnesday, December 15, 2010

전쟁-오토딕스




박흥수 | 조합원
 
 
지난 5월 28일 태양이 한 여름의 불덩이처럼 대지위에 쏟아질 때 땀을 삐질 흘리며 서울대 미술관을 찾았다. 한국에서는 좀처럼 만나보기 힘든 독일의 작가 오토딕스의 그림을 보기 위해서였다. 오토딕스란 작가를 알게 된 건 지난해 발간된 서양근대미술기행이란 부제가 붙은 <고뇌의 원근법>이란 책을 통해서다.

책의 저자는 재일조선인 2세인 서경식 선생이다. 선생이 아직 어린 학생시절 그의 큰형과 작은형이 모국의 학교인 서울대에 공부하러 왔다가 재일동포 유학생 간첩단 사건으로 구속되었다. 형제들이 살인적인 고문과 회유의 공작 속에서도 뜻을 굽히지 않고 십 수 년을 모국의 감옥에서 복역하는 동안 서경식 선생의 가족은 파괴되었다. 서경식의 큰형 서승은 1심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2심에서 무기징역으로 수감생활을 했다. 작은 형인 서준식은 7년형을 언도받고 만기를 채웠으나 보호관찰제란 미명아래 10년을 더 감옥 속에서 지내게 된다. 양심을 지킨 대가로 24세의 푸른 청춘에 옥살이를 시작해 41세의 중년이 되어서야 햇빛을 볼 수 있었다. 현해탄을 건너며 아들들의 옥바라지를 하던 어머니가 자식들의 석방을 보지 못한 채 한을 품고 돌아가셨다. 파란과 굴곡 속에 일그러진, 이 시대의 부조리와 모순의 한 복판에서 청춘을 달린 서경식 선생의 삶은 선생이 이 세상의 고통에 더 세밀하고 진지하게 다가서도록 하는 밑거름이 되지 않았나 생각된다.
선생은 재일동포 2세이다. 모국은 한국인데 교토에서 태어나 일본어를 모어로 하는 삶을 살게 된다. 일본에서는 조센징이라는 욕을 들으며 차별을 받고 한국에서는 모국어도 못하는 쪽바리 놈이라는 욕을 먹으며 살았던 수많은 재일동포들과 마찬가지로 어디에도 제대로 소속되어질 수 없는 삶을 강요당했다. 선생의 최근 저작인 <경계에서 춤을 추다>나 부조리한 시대와 광포한 역사의 수레바퀴에 내던져진 추방자들의 이야기를 다룬 <디아스포라>같은 책들을 보면 그가 살아왔던 기구한 운명의 굴레를 간접적이나마 들여다 볼 수 있다. 스스로가 처절하게 체험했던 일들이기에 그의 글은 특유의 진득한 설득력을 가지고 있다. 그는 우리에게 언제나 이야기 한다. 이성과 양심으로 우리를 돌아보고 어디에도 선뜻 속할 수 없는 약자에게 손을 내밀자고.
4월 1일 시작된 오토 딕스전은 두 달의 전시기간을 막 마감하려는 시점이었다. 내일로 미룰 수 있는 일은 절대 오늘 하지 않는다는 생활습관을 가진 필자는 두 달의 전시기간이 넉넉하다고 생각하다가 마감을 앞두고 헐레벌떡 뛰어갔다. 서울대 미술관에 걸린 작품은 오토 딕스의 많은 그림 중에 주로 1924년에 발표된 판화작품들로 ‘전쟁’이란 부제를 달았다. 서울대 관악캠퍼스 초입에 멋지게 들어서 있는 미술관은 규모도 웅장하고 전시실도 쾌적했다. 미술관 내부의 강당에서는 학부생들을 대상으로 교양강좌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극장처럼 계단식 좌석에 앉아 교수의 프리젠테이션 강의를 열심히 듣고 있는 학생들의 모습을 보니 부러움과 감회가 밀려왔다. 캠퍼스의 잔디밭을 걷는 학생들도 농구코트에서 몸을 부딪히며 땀을 흘리는 학생들도 강의실의 학생들도 모두 평화로워 보였다. 어디서도 전쟁의 그림자는 볼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 시점 한반도는 당장이라도 전쟁을 불 사 할 것 같은 분위기로 뒤덮여있었다. 오토딕스전이 마치 한반도의 이런 상황을 예상이라도 한 듯 전쟁이라는 주제로 열리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었다.
이날 필자는 난생처음으로 부재자 투표를 했다. 투표당일 근무시간표가 열차를 몰아야 한다면 선거에 참여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투표행위에 대해 일부러 부재자 신청까지 하면서 부산을 떨었던 이유는 광기가 뒤덮고 있는 한국사회에 숨이 막혔기 때문이다. 5일 앞으로 다가온 6.2 지방자치단체장 선거를 앞두고 전쟁불사를 외치는 세력의 무모함과 광적인 행위들을 앉아서 바라볼 수많은 없었다. 3월 26일 침몰된 천안 함 사건은 한반도 앞날에 짙은 구름을 드리웠다. 냉정하고 현명한 대처만이 이 짙은 구름을 걷히게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후 진행된 상황은 구름을 걷히게 하기는커녕 점점 더 짙은 어둠속으로 나라 전체가 끌려들어갔다. 선거를 앞두고 서둘러 발표된 천안함 사건 조사 결과가 북한군의 어뢰공격으로 인한 침몰이란 결론이 나자 온 나라는 긴장의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유세차량에서는 공공연하게 북한을 응징하자는 이야기가 나왔고 방송을 탔다. 보수언론들은 보복타격이야기를 내놓고 전쟁을 두려워해선 안 된다고 목청을 높였다. 선거가 끝난 이후에도 몇 달 동안 유엔을 둘러싼 남과 북의 외교전이 불을 뿜고 중국해군이 서해상에서 무력시위를 했으며 동해에서는 한미 연합군이 군사훈련을 통해 힘을 과시했다. 한국 국방부는 서해상에서 대잠훈련을 하겠다고 발표했고 북한당국은 응징타격을 하겠다고 맞대응해왔다. 서로의 대응이 에스컬레이터 되어 끊임없이 올라가고 있다. 전 세계에서는 신냉전이 한반도에서 첨예하게 벌어지고 있다고 주목하고 있다. 어쩌면 냉전이 열전으로 변할 지도 모른다면서.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우리 서울기관차 사무소의 기관사들은 휴전선을 넘어 개성공단까지 열차를 운행했다. 지뢰가 제거되고 선로가 깔리고 사람들이 만나고 정말 평화가 얼마나 소중한지 피부로 느꼈던 우리였다. 그러나 지금 개성행 열차는 중단 된지 오래고 더 나아가 서로를 증오하며 보복과 응징을 이야기 하고 있다. 정치권력의 변화가 이 땅의 사람들의 운명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잘 보여주고 있다.
 
오토딕스의 동판화 연작시리즈 전쟁은 제1차 세계대전을 그리고 있다. 잠시 1차 세계대전에 대해 생각해보자.
 
 
완전히 다른 전쟁 - 1차 세계대전


1차 세계대전 이전의 대규모 전쟁 중 하나를 꼽으라 하면 1815년 나폴레옹의 군대가 반 프랑스 연합군인 영국, 프로이센, 러시아, 오스트리아 군대와 싸운 워털루 전쟁을 꼽을 수 있다. 이 전쟁의 결과가 본국에 알려진 시간은 기원전 카이사르 군대가 갈리아 원정 당시 여러 전투에서 승리를 거둘 때 로마에 전령을 보내 승전보를 알린 시간과 별 차이가 없다. 전쟁은 군대를 모집해서 오랫동안 이동하여 전장으로 불리는 곳에 모여 상대 병력과 전투를 벌이는 것이 정형이었다. 전투상황에 맞게 보급을 더 확대하거나 군대를 모아서 보충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전황을 전달 받는 데도 여러 날이 걸렸고 불리한 걸 깨닫고 군대를 보내봤자 이미 전투는 끝나있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약속된 날짜에 지원군이나 동맹군이 전장에 당도하지 않아 낭패를 본 전투가 하나 둘이 아니었다. 군대의 전술도 기병과 보병의 적절한 배치 및 운영이 핵심이었다. 기병의 기동력으로 상대의 허를 찌르거나 예봉을 격파하고 결정적인 순간 보병의 저돌적이고 용감한 돌격전술이 승리의 관건이었다. 물론 나폴레옹시대에는 포병과 소총병이 있었지만 파괴력과 전술적인 영향력은 현대전에 비해 크지 않았다. 1차대전에 참전한 전쟁지휘관들은 과거 수백 년 동안 이어져온 군대의 전술패턴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이들은 자본주의가 사회를 완전히 바꿔놓았듯이 전쟁도 바꿔놓았을 거라는 생각을 미쳐 할 수 없었다. 그래서 1차 대전이 발발 하기 전 교전 당사국들의 최고위급 장군들과 참모들은 전쟁이 오래가지 않을 것이라고 봤다. 독일은 쉽게 파리를 점령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보았고 프랑스군은 서너달이면 독일을 물리치고 전쟁을 끝낼 수 있다고 믿었다. 이들 장수들과 참모들은 모두 이전의 전쟁을 생각했고 전술과 교리도 그것을 바탕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결국 이런 판단은 천만 명이 넘는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가는 결과를 나왔다. 이제까지의 전쟁에서 이렇게 큰 인명손실은 나온 적이 없었다.
 
>> 전쟁 첫해 서부 전선에 배치되었던 독일의 맥심 기관총 운용조
1차 세계대전은 자본주의체제가 시작된 이후의 최초의 대규모 전쟁이다. 자본주의가 낳은 전쟁이면서 자본주의체제가 수행한 전쟁이고 이후에 벌어질 전쟁의 양상을 극명하게 보여준 계시였다. 생산력의 폭발은 산업혁명의 기치아래 근대 자본주의체제를 살찌웠다. 근대산업자본주의체제는 하루가 다르게 새로운 문명을 만들어내고 이것들을 개선시켜 세상을 바꿨다. 그중에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친 것 중의 하나가 시공간을 재편한  이동수단의 발단이다. 특히 철도의 발달은 기원전 로마시대 이후 별 변화가 없었던 이동시간을 극단적으로 단축시켜주었다. 이동시간의 단축은 상품과 정보, 사람의 이동을 폭발시켰으며 세상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마르크스는 <공산당 선언>에서 철도가 노동자들을 서로 연결시켜 줌으로써 노동자들의 단결을 돕는다고 말했다. “중세의 도시민들이 보잘것없는 도로망으로 수백 년에 걸쳐 이룩한 단결을 현대의 노동자들은 철도 덕분에 불과 몇 년 만에 이루어낸 것이다.”<공산당 선언 中> 그러나 철도가 노동자의 결집과 단결에만 도움을 준건 아니었다. 철도는 군대의 이동도 수월하게 해서 단결한 노동자들을 진압하거나 적국과의 전투에 투입되는데도 중요한 수단이 되었다. 산업의 발달은 필연적으로 무기의 발달을 가져왔다. 산업혁명이후의 과학기술의 발달은 기계공학과 화학, 생물학에도 엄청난 전진을 가져오게 했다. 현대식 무기의 개발과 생산이 앞다투어 이루어졌고 독가스 등 화학적 무기도 만들어졌다. 역사가들은 1차 대전의 가장 인상적인 장면을 꼽으라면 참호와 철조망 그리고 기관총을 뽑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특히 기관총은 1차 대전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무기이다.
 
극강의 효율적인 살인무기인 기관총의 효과는 2003년 톰 크루즈가 주연한 <라스트 사무라이>에서 잘 표현되어 있다. 일본군의 현대화를 담당하기 위해 파견되었던 주인공이 사라져가는 사무라이 정신에 매료되어 결국에는 사무라이 편에 서게 되고 이들과 함께 한 때 자신이 가르쳤던 신식 일본군대와 맞서 전투를 벌이게 된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톰 크르즈는 사무라이 들과 함께 신식일본군이 포진하고 있는 진영을 향해 말을 달린다. 이때 화면 가득 풀샷으로 태양에 번뜩거리는 황금 빛 기관총이 불을 뿜는다. 받침대 위에서 좌우로 움직이며 회전하는 총열에서 발사되는 총탄은 벌판가득 달려오는 사무라이들을 가차 없이 고꾸라 뜨린다. 이 장면을 보면서 나는 1894년 동학농민항쟁때의 우금치 전투를 떠올렸었다. 백성들은 아랑곳 하지 않는 무능한 왕실과 주변의 친일 정치모리배들, 일본의 제국주의 침탈에 맞서 일어났던 동학농민들은 전봉준, 손병희 등을 앞세우고 전라도, 충청도를 거쳐 공주에 다다랐다. 백성들에 패악질을 일삼던 관군들은 분노한 농민군에 참패하고 도망치기에 바빴다. 11월 8일 관군을 밀어붙이던 농민군은 공주 우금치 고개에 다다랐다. 다음날 농민군 수만 명은 500년 한을 풀고자 한양을 향한 진군의 북소리와 함께 일제히 우금치고개 정상을 향해 달려나갔다. 조일연합군으로 일본군을 이끌고 우금치 고개 정상에서 이 광경을 보고 있던 모리오 마사이치 대위는 미소를 머금은 채 사격명령을 내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마침내 사정거리 내에 수천 명의 동학군이 당도한 것을 확인한 마사이치 대위는 사격명령을 알리는 총성을 울린다. 우금치 고개 마루에서는 일본군의 기관총들이 불을 뿜었다. 200여명이 조금 넘는 일본군은 몇 십 배의 병력으로 달려오는 조선농민군들을 폭풍에 흩날리는 낙엽처럼 날려버린다. 이날의 헌병대 전황 보고서에는 ‘조선비적 수천사망, 부상. 아군 피해 무’라는 짧은 기록이 실렸다.
1800년대 중반부터 개발된 기관총은 해가 갈수록 성능을 개량했다. 6개에서 10개의 총구가 회전 프레임 안에 탑재되어 1분에 300발 이상의 총탄을 발사할 수 있던 기관총은 1885년 미국의 발명가 맥심의 개발에 의해 전환점을 맞는다. 탄환의 반동에너지를 이용해 소비된 탄약을 방출하고 다음 탄약을 집어넣는 방식을 택한 맥심 기관총은 탄띠가 전부 소모될 때까지 사격할 수 있었다. 1분당 600여발 가까이 발사되는 매력적인 무기는 군부를 설득하기에 충분했다. 1889년 영국육군은 맥심기관총을 채택했고 다음해에는 독일,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스위스, 러시아 육군도 맥심기관총을 구입했다. 맥심기관총은 1893년 시작된 아프리카 마타벨레 전쟁에서 영국군이 최초로 실전에 사용 했다. 아프리카 짐바브웨 마타벨레 해방을 위해 나섰던 전사 5000명을 4정의 맥심기관총을 가진 50여명의 영국군이 단 한차례의 교전에서 궤멸시켰다. 1898년 수단에서도 영국군이 맥심기관총을 가지고 수단인에 대승을 거두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때 이미 맥심기관총의 가공할 성능을 알았음에도 엄청난 사상자가 단지 흑인의 열등함을 알려주는 증거일 뿐이라고 치부해버렸다.
이런 일들이 고도의 진보를 걷고 있고 문명화된 유럽에서 엄청난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1차 대전을 연구한 역사가 존 엘리스 맨체스터대학 교수는 기계시대의 ‘돌격 앞으로’라는 허망한 전술이 비참하고 끔찍한 결과를 가져왔다고 분석했다. 그러나 군 지휘부와 수많은 고위장교들은 “단호하고 줄기차게 돌격하면 적의 투지가 와해된다”라는 신념을 버리지 않고 적진을 향해 돌격할 것을 명령했다. 그러나 앞서 말한 존 엘리스교수는 백 년 전이면 타당했을 전술이 기관총 사수들에게 측은함을 일으키게 하는 대량 살육행위에 불과했다고 말한다. 영국군 청년 장교는 편지에서 “용감한 병사 세 명이 운용하는 이 작은 악마가 부대원들을 쓰러뜨리는 모습을 본다면 대규모 돌격전, 특히 기병대의 돌격은 꿈도 꾸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썼다.
영국, 프랑스 연합군이 대규모 공세를 벌인 솜 전선의 독일군 기관총 사수는 이렇게 썼다.
 
“우리는 그들이 걸어오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전에는 그런 모습을 본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장교들이 앞장을 섰다. 우리는 사격을 개시했다. 그리고 탄약을 장전하고 재 장전하기만 하면 됐다. 그들은 수백 명씩 스러졌다. 조준할 필요가 없었다. 우리는 그들에게 총알을 빗발처럼 퍼부었을 뿐이다.” <참호에 갇힌 1차 세계대전, 존 엘리스, 130쪽>
 
1차대전에서 기관총과 함께 커다란 역할을 한 것은 대포였다. 산업기술의 발전은 대포의 성능을 비약적으로 발전시켰다. 레마르크의 소설 ‘서부전선 이상 없다’에서 주인공 파울은 포탄이 비 오듯 쏟아지는 전선에서 공포에 떨며 지옥 같은 전장의 현실을 생중계한다.
 
“한 발의 포탄이 터지고 곧 이어서 다른 포탄이 터진다. 콩 볶는 듯한 기관총 소리가 들린다. .....갑자기 포탄이 다시 튀어 뒤로 돌아오는 소리가 들린다. 나는 즉각 포탄 구덩이의 물웅덩이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가,  철모를 목덜미 까지 눌러 쓰고는, 겨우 숨을 쉴 수 있을 정도까지만 입을 위로 들어올린다. 그런 다음 옴짝달싹하지 않는다.”
  

 머리 위를 뒤덮는 거대한 포탄 덩어리들과 눈앞으로 날아오는 기관총탄 세례에 최고의 문명을 이루어 냈다고 자부하는 인간들은 처참하게 쓰러져갔다. 3개월이 못가 끝날 거라는 전쟁은 끝이 보이지 않게 지속되었다. 독일, 프랑스 국경과 벨기에를 관통해 북대서양 까지 거대한 참호가 파여졌고 이 참호를 사이에 두고 전쟁은 계속되었다. 철도가 끊임없이 본국에서 사람과 탄약을 실어 날라 소모분을 보충했기 때문이었다.
끝없이 이어지는 참호 속으로 긴 바케트 빵의 갈라진 틈으로 잼을 발라 넣듯이 소모된 분만큼 채워 넣었다. 1차대전은 참호전이자 소모전이며 경제전이라는 현대전의 모습을 여지없이 드러내주었다. 사람이 얼마나 죽어나가는지는 문제될 게 없었다. 그저 주기적으로 보고되는 전황목록에서 차지하는 한 줄의 기록에 불과했다. 요리 재료리스트의 그것처럼. 

잼 다섯 박스, 사망 560명. 다음 주문은 가장 빨리 도착하는 열차편으로 병사 1000명.

>> 1914년 1차 세계대전 서부전선
1914년 8월 독일은 애국의 물결로 뒤덮인다. 영웅적이고 낭만적인 전쟁에 대한 환호는 월드컵 응원전처럼 거리를 뒤덮었다. 아주 소수의 사람들, 이를테면 로자 룩셈부르크나 가를 리프크네히트, 하인리히 만 등 노동자와 시민들을 중심으로 제국주의 전쟁을 거부하자는 스파르타쿠스단이라는 사회주의단체 사람들이 있었지만, 전쟁의 광기가 뒤덮은 세상에서 이들의 목소리는 가볍게 무시되었다. 23세의 오토딕스는 동시대의 평범한 독일 청년들처럼 조국의 영광에 들떠있었다. 침략자를 물리치고 조국을 수호하며 국가와 가정을 지키는 자랑스러운 일에 함께하는 것은 독일 젊은이로서 당연한 일이었다. 23살. 드레스덴의 미술학도였던 오토딕스는 붓을 버리고 자원입대 했다. 훈련소에서 포병과 기관총병으로 훈련을 받고 난 뒤 1915년 9월 서부전선에 투입된다. 그 유명한 레마르크의 소설 ‘서부전선 이상없다’의 그 서부전선으로. 딕스는 서부전선의 유명한 전투인 마른, 랭스, 솜강 전투를 전전하며 전쟁의 실체를 두 눈으로 확인하게 된다. 러시아전선인 동부전선에도 배속되었다가 다시 서부전선으로 돌아온 딕스는 1차대전이 끝난 1918년 12월 살아서 고향으로 돌아온다. 이처럼 1차 세계대전의 전 과정을 온 몸으로 겪어낸 예술가는 흔치 않다. 그래서 더 사실적인 묘사를 할 수 있지 않았을까? 딕스는 아마도 심각한 전쟁 후유증을 겪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전쟁 이후 그가 그린 그림을 보면 그림을 제대로 마주하지 못하고 인상을 찌푸리거나 외면하게 되는 끔찍한 작품들이 쏟아져 나오기 때문이다. 쌓여있는 시체더미들. 독가스에 절규하며 말라 비틀어지는 폐가 있는 가슴부위를 움켜잡고 서서히 죽어가는 병사들, 괴기한 괴물의 모습으로 목표를 상실한 채 돌격하는 모습,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터져 나온 자기의 내장을 손으로 받진 채 바라보는 병사, 포탄에 팔, 다리가 잘려나가고 두 눈이 멀고 침수된 참호 속 진흙밭에서 익사하는 동료들의 모습을 보면서 지낸 4년의 전쟁기간은 오토딕스에게는 지옥의 순례길이었을 것이다.
서경식 선생의 <고뇌의 원근법> 중 한 구절을 보자.

“어느 비평가는 딕스의 작품이 ‘소름 끼치도록 끔찍한 인간의 건망증을 박살낸다’고 말한다. 그가 그린 전장과 병사는 결코 영웅적이지도 않고 낭만적이지도 않다. 오히려 영웅화나 낭만화의 외피를 남김없이 벗겨낸다.”
 
딕스는 전쟁의 맨얼굴을 보았던 것이다.
초등학교 시절 4층에 있는 교실에 가기 위해서 계단을 올라갈 때 층과 층 사이 교실들로 이어지는 복도 끝에는 커다란 그림들이 걸려있었다. 그림들은 전쟁화들이었는데 이순신 장군이 험한 파도 속에서도 진군의 명령을 내리거나 강감찬 장군이 말을 타고 고려땅을 침공한 요나라 군사들을 물리치는 멋지고 장엄한 그림들이었다. 그 중에는 조선인민군의 공격에 맞서 이를 악물고 돌격을 감행하는 대한민국군의 모습을 그린 한국전쟁화도 있었다. 전쟁은 사나이라면 기꺼이 나아가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이 멋지고 당연한 것이라는 생각을 해왔던 것 중엔 국가주의적 교육이외에도 이런 전쟁화의 덕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오토딕스는 전쟁화의 가면을 벗겨내고 진짜 전쟁화를 그렸다.
1차대전을 이야기한 예술가 중에는 <서부전선 이상없다>를 쓴 레마르크가 가장 유명한 사람 중의 하나일 것이다. 레마르크는 딕스처럼 실제로 전쟁에 나갔다 겪은 일들을 소설로 써 큰 파장을 일으킨다. 이후의 작가들에게 끊임없이 영감을 불어 넣어주는 전쟁문학의 독보적 반열에 오른 이 반전소설은 결국에는 나치 독일에 의해 수거되어 불태워진다. 오토딕스의 그림이 나치에 의해 ‘아리아 인종의 우수성과 독일 민족의 위대함’을 부정하는 퇴폐미술로 낙인찍혀 조롱당한 것을 보면 두 작가는 비슷한 운명에 처해진다. 서경식 선생의 말처럼 오토딕스의 그림은 레마르크의 <서부전선 이상없다>의 삽화로 그려진 것이라 해도 의심할 바 없이 1차대전의 생생한 현실을 보여준다. 딕스의 1924년 전쟁 연작 중 <독가스의 희생자들>을 보면 의무대로 옮겨진 독가스를 마신 병사들이 누워있다. 의무병으로 보이는 이들이 곁에 서서 이야기를 나누는데 살 가망이 없어 보인다는 표정이다.
레마르크의 소설 속 한 구절을 보자.

▲ 오토딕스의 전쟁 연작 중 <독가스의 희생자 들>

“마스크를 착용하고 몇 분간이 생과 사를 판가름 한다. 가스가 새지 않는가? 나는 야전 병원에서 본 처참한 모습들이 생각난다. 그건 독가스를 마신 병사가 며칠 동안이나 목이 졸리는 듯한 상태에서 다 타버린 폐를 조금씩 토해내는 장면이었다.”

1차 대전이 참호로 상징 되듯이 딕스는 1923년 <참호>라는 작품을 완성했다. 1차 대전 당시 참호는 전쟁 중에 실상과 다르게 전선의 후방에 있는 민간인들에 선전되었다. 참호의 안락함을 선전하는 수많은 조작된 이미지가 전쟁에 참여한 모든 나라에서 횡행했다. 프랑스의 잡지 ‘알리스트라쉬옹’ 삽화에는 군인들이 적과 대치한 참호 안에서 당구와 펜싱을 즐기고 레스토랑에서 유리잔을 부딪히며 식사를 즐기는 모습이 실렸다. 베를린에서는  땅을 파서 참호를 만들고 시민들에게 관람을 시켰다. 참호로 소풍 나온 시민들은 만면에 웃음을 지으며 참호시설을 둘러봤다. 이 참호 안에는 카페, 레스토랑, 영화관까지 있었다. 어느 전쟁, 어느 국가에서나 거짓과 조작은 승리를 위한 필요조건으로 여겨졌다. 딕스는 1차 대전이 끝나고 채 10년도 지나지 않아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끔찍한 질병 중의 하나인 ‘망각’의 병에 물들어 다시 국가와 민족에 대한 충성과 영웅주의가 횡행하자 있는 그대로의 전쟁을 그렸다. 


딕스의 말을 들어보자.
 
“바이마르 공화국에서는 많은 책들이 거침없이 영웅적 행위나 영웅주의를 새롭게 선전하고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의 참호에서 이미 그 부조리함이 증명되었음에도 말이다. 사람들은 얼마나 무서운 전쟁의 고통이 자신을 덮쳤었는지 잊어버리고 있는 중이다. 나는 불안이나 패닉을 불러일으키려는 것이 아니라, 전쟁의 무서움을 전하고 전쟁을 저지하는 힘을 일깨우려는 것이다.” <고뇌의 원근법>
 
참호의 화폭 안에는 한 눈에 봐도 지옥이 그려져 있다. 몸통이나 팔, 다리가 잘려나간 시체들, 진창에 박혀 절규하다가 죽어간 시체들, 철조망에 살점을 뜯긴 채 숨져간 시체들이 말 그대로 널브러져 있다. 죽은 사람들의 모습을 자세히 보면 성한 사람들이 하나도 없다. 내장이 튀어 나오거나 얼굴 한 쪽 피부가 완전히 벗겨져 뼈들이 드러나 보이거나 사지가 갈갈이 찢겨져 있다. 그림을 보는 순간 그 잔인함에 저절로 인상이 찌푸려진다. 딕스는 ‘너희들이 이 그림을 보고도 전쟁을 찬양하고 죄 없는 젊은이들을 지옥으로 끌고 갈테냐?’고 묻고 있는 듯하다.
<서부전선 이상없다>에서 주인공 파울은 부상당한 어린 신병을 부축한다.
 
“우리는 옷을 벗기고 허리 부분을 살펴본다. 뼈가 온통 부서지고 살이 완전히 뭉개져 버렸다. 관절에 정통으로 맞은 것이다.”
 
“뿌연 어스름 속에 찢겨진 다리 하나가 눈앞에 놓여 있다. 군화는 어디 하나 흠잡을 데 없이 무사하다”
 
“하이에 비스트후스가 등이 찢어진 채로 질질 끌려온다. 숨을 쉴때 마다 상처를 통해 폐가 뛰는 모습이 보인다. 나는 그저 그의 손을 잡아 줄 뿐이다.”
 
“우리는 두개골이 없이도 살아 있는 사람을 본다. 우리는 두 다리가 다 날아간 병사가 달리는 것을 본다. 두 다리가 절단되었는데도 비트적거리며 인근의 구덩이로 들어가는 자도 있고, 두 무릎이 박살난 어떤 상병은 2킬로미터나 되는 거리를 두 손으로 기어서 몸을 끌고 온 경우도 있다. 어떤 다른 병사는 흘러내리는 창자를 두 손으로 움켜잡은 채 응급 치료소까지 온 경우도 있다. 우리는 입과 아래턱, 얼굴이 없는 사람을 본적도 있다. 또한 우리는 과다 출혈로 죽지 않으려고 이빨로 팔의 정맥을 두 시간 동안이나 꽉 물고 있던 병사를 발견하기도 한다. 어김없이 해는 떠오르고, 밤은 찾아오며, 유탄은 쉭쉭 소리를 내고, 사람들은 죽어간다.”


소설의 주인공 파울은 고등학교 담임선생의 독려와 인솔로 같은 학교 친구들과 전쟁에 참전하게 되었다. 작가 레마르크의 자전적 경험이 그대로 투영된 것이다. 조국과 민족의 위대한 영광을 위해 전장에 나가도록 독려당한 수많은 젊은이들 중에 레마르크와 오토딕스가 있었다. 레마르크의 소설후반부에 주인공 파울이 그의 담임선생을 조롱하듯이 딕스도 전쟁을 미화하고 영웅화하는 사회에 일침을 가한다. 진실을 보라고!
군부는 자신들의 결정적 실수조차도 영웅행위로 둔갑시키는 탁월한 능력을 갖고 있다. 1914년 11월 10일 벌어진 랑게마르크 전투에서 독일군은 제대로 훈련조차 받지 않은 젊은 대학생 지원병을 전선에 투입해 프랑스와 영국군의 기관총 사격 앞에 돌격시키는 등 무모한 공격을 개시해 사상자가 투입병력의 70%나 되었다. 랑게 마르크 전투는 향후 약 4년 반 동안 독일인들에게 희생정신과 애국심을 강조하는 가장 대표적인 사례로 인용되었다.
 
전쟁이 대의를 지키는 숭고한 행위라고 모두가 이야기 하지만 그 속에는 저마다의 검은 속셈이 숨겨져 있다. 식민지의 보전이나 자원의 획득, 정권의 안정, 다가올 선거에서의 승리까지 다양하다. 전쟁의 수행으로 이익을 보는 세력들의 입장에서는 다수의 비극을 등에 업고서라도 계속 이어져야할 수지맞는 장사일 뿐이다. 전쟁 수행을 업으로 할당받은 군부도 전쟁은 자신들의 존재가치를 증명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로 여겨 끊임없이 호전적 대결을 부추긴다. 그러나 이들 군부의 행태란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일관되게 어이없는 부조리와 오류를 반복한다. 존 엘리스의 <참호에 갇힌 제1차 세계대전>에 소개된 삽화를 보면 포탄이 빗발치는 참호의 한 벙커에서 목숨을 걸고 상부로부터 전달된 긴급 전화를 받는 병사의 모습이 보인다. 제목은 [중요한 문제]이다. 루스 9월 대공세가 한 창 일 때 최전방의 지휘 장교가 총사령부로부터 받은 긴급전언은 다음과 같다.
 
“지난 금요일에 귀 부대로 지급된 딸기잼 깡통 수를 최대한 빨리 보고하라!”
 
어느새 대의는 사라지고 눈을 시퍼렇게 뜬 채 자신들이 추구하는 이권에만 몰두하는 아비규환의 전쟁에서 인간의 이성과 양심을 믿었던 사람들은 절망할 수밖에 없었다.
제1차 세계대전은 이후 현대사에서 벌어질 모순과 굴곡의 초기배아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너무 많은 것들을 압축하고 있었다. 성능 좋은 프로그램으로 꽉 압축되어 있던 파일이 열리자 엄청난 용량의 데이터들이 모니터에 현시되듯 판도라의 상자가 열린 것이다. 자본주의라는 이름의 판도라의 상자가. 제1차 세계 대전은 우주의 블랙홀과 화이트홀처럼 오늘 날 존재하는 세계의 저 끝에 있는 문이다.
1차 세계대전은 유럽전선에서만 벌어진 게 아니다. 아프리카에서도 제국주의 국가 간의 전쟁이 벌어졌다. 영국, 프랑스, 벨기에, 포르투칼 등 연합국 군대가 1916년 이후 토고, 카메룬, 나미비아를 포함한 서남아프리카와 탄자니아 등 독일의 동아프리카 식민지 군대를 공격했다. 아프리카 사람들은 이 전쟁에 강제로 징발되었다. 연합국과 독일은 식민지의 자원과 인력을 동원하여 전쟁을 벌여 무고한 아프리카인들의 희생이 뒤따랐다. 약 200만 명의 아프리카인이 1차 세계대전에 동원됐다. 이 중 20만 명이 전사하거나 사망했다. 이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식민지 모국의 통치 편의에 의해 국경이 변경되고 종족 간 차별이 일어났으며, 자원의 약탈이 심화되었고, 오늘 날 벌어지고 있는 아프리카 분쟁의 씨앗이 되었다.
 
오스만 제국이 지배하고 있던 아랍도 1차 세계대전의 광풍을 피해갈 수는 없었다. 미국의 CIA가 세계 여러 나라에 자신들에게 적대적이거나 비우호적인 정권을 견제하거나 제거하기위해 저항세력을 지원했듯이 영국과 프랑스는 오스만 제국에 저항하는 아랍동맹군을 지원한다. 영국으로서는 아랍지역에 있는 엄청난 석유 자원을 못 본 척 할 수가 없었다. 이슬람 성지인 메카와 메디나 주변 헤자즈 지역의 샤리프 후세인이 지도하는 하심 아랍세력이 오스만에 저항하는 핵심으로 부상하고 결국 영국의 지원을 바탕으로 중동에서 아랍정부를 수립하게 되었다. 오스만독재에서 벗어난 아랍은 정치적으로 서방의 후원을 받는 1인 지배체제로 변환되는 과정을 거친다. 현재의 요르단과 사우디아라비아 등 친 서방 아랍국들의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게 되면 만나는 것이 1차 세계대전시기의 세계사이다. 

팔레스타인에서도 오스만 제국의 터키군과 영국군의 전투가 이루어졌다. 이집트 원정군 사령관으로 팔레스타인 전투를 지휘한 영국의 알렌비 장군은 수차례 교전 끝에 1917년 12월 9일 예루살렘에서 터키군을 몰아냈다. 서방의 언론들은 1187년 이후 처음으로 기독교인이 예루살렘을 손에 넣었다고 환호하며 알렌비 장군을 현대의 십자군으로 부추켰다. 팔레스타인을 점령한 영국은 1917년 벨푸어 선언을 통해 팔레스타인지역에서의 유대민족국가 수립을 지지한다고 밝혔다. 오늘날까지 비극이 끊이지 않는 팔레스타인 분쟁의 시발점이었다.
현재의 이라크 지역을 점령하고 있던 오스만 제국의 터키군은 영국에 의해 쫓겨나고 러시아에 의해 압박받는 곤란을 받고 있었다. 러시아와 대결하던 1915년과 1916년에 터키군은 아르메니아 지역에서 기독교인들을 공격했는데 이때 학살당한 아르메니아인들이 100만 명이었다. 이 끔찍한 민간인 학살은 이후의 전쟁에서 벌어질 수많은 대량학살극의 불길한 예고편이었다. 

1917년 러시아에서 레닌과 트로츠키가 이끄는 볼세비키가 혁명에 성공하고 이에 대응해 구체제를 옹호하는 러시아 백군과의 내전에 들어가자 서구 자본가들은 공산주의자들의 혁명에 반대해서 내전에 개입한다. 연합군은 러시아 곳곳의 지역에서 백군의 장군과 병력을 지원하면서 볼세비키에 대응했다. 프랑스와 영국, 미국의 군대가 여기저기에서 러시아 혁명의 분쇄를 위해 분투를 벌였다. 그러나 제정 러시아의 차르체제에 혹독함을 경험했고, 기나긴 전쟁에 환멸을 느낀 러시아 민중들은 사회주의라는 대의를 내건 혁명세력을 선택했다. 인류역사상 최초로 자본주의 세력과 사회주의 세력의 대립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이 대립은 2차 세계대전을 거쳐 양 진영의 패권 다툼으로 크고 작은 비극을 양산해내는 시발점이기도 했다. 

 
동아시아에서는 1차대전의 혼란을 틈타 일본의 대륙진출 야욕이 불타올랐고, 영국과 동맹을 맺은 일본은 독일 해군이 주둔하고 있던 중국의 칭다오항을 탐내고 있었다. 이미 조선에서는 일본의 대륙진출정책 수행을 위해 부산에서 신의주까지 횡단철도를 개설했다. 철도개설 후에는  미국이 필리핀을, 일본이 조선을 취한다는데 서로 동의하는 가스라-태프트 조약을 맺어 미국을 비롯한 강대국의 묵인아래 조선을 합병한 상태였다. 1914년 8월 일본은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고 9월 칭다오의 독일군기지를 공격했다. 일본이 주도하고 영국-인도 연합군이 합세한 전투는 11월 독일의 항복으로 끝이 났고 일본은 칭다오항을 접수해 또다른 대륙진출의 교두보를 마련한다. 일본은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와도 협력하여 독일이 태평양에 건설한 식민지 미크로네시아와 뉴기니를 점령했다. 태평양에서 독일의 식민지가 정리되자 영국과 유럽연합군은 유럽전선에만 신경쓸 수 있게 되었다. 일본은 동북아시아의 신흥맹주로 떠오르고 태평양과 중국대륙까지 그 영향력을 확대하는 계기가 되었다. 

1차 대전은 산업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급속한 성장을 이룬 서구 제국주의의 이권 쟁탈과정에서 파생된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모든 모순을 담은 채 폭발했다. 안락한 북반구와 비참한 남반구의 남북문제, 아프리카의 영토, 종족분쟁, 아랍과 이슬람권의 자원과 패권 문제, 유대인의 팔레스타인 점령문제, 발칸 반도를 비롯한 여러 곳의 민족문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동서대립과 냉전 문제, 전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영유권 분쟁문제, 대량학살문제, 인종청소문제, 난민이나 이민자 등 디아스포라적 문제 등등. 그리고 더 심각한 문제는 1차 대전이후 전쟁이나 그 위협이 국제분쟁을 해결하는 주요 수단으로 자주 이용됐고 여기에는 강대국들의 산업발전에 따른 전쟁수행능력의 자신감이 주요한 동기가 되었다. 소위 상대에 대한 전쟁 억지력을 담보한다는 미명하에 벌어진 끝없는 군비경쟁은 비극적인 전쟁을 일상화 했으며 오늘 날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세상에서 가장 정의롭다는 국가의 군대는 한 시도 전쟁을 멈춘 적이 없다. 인간과 그 공동체에 가장 비극적인 결과를 안겨다 주는 전쟁을 일상적이면서도 주요한 문제해결의 한 방편으로 삼고 있는 인류의 일부와 그 일부가 신봉하는 체제는 과연 정상인가? 제 정신인가?
  
▲ 전쟁화 중 최고의 걸작 - 딕스의 전쟁 제단화


서울대 미술관의 오토딕스 초대전에는 걸리지 않았지만 딕스가 그린 전쟁화 중 아니 그 어떤 화가가 그린 전쟁화 중이라도 최고의 작품은 딕스의 1932년작 전쟁제단화가 아닐까 생각한다. 프란시스코 고야나 피카소 같은 대가들도 전쟁을 그렸고 그들의 작품들도 대단하지만 딕스의 전쟁제단화는 전쟁의 실체를 눈앞에 툭 던져놓고 있다. 1929년부터 4년의 시간을 공들여 그린 이 그림은 1차 대전이 끝난 혼돈의 시대에 완성됐다. 독일 최초의 공화국인 바이마르 공화국이 군부와 우익세력들의 휘둘림에 의해 서서히 그 운명을 다해가던 시절이었다. 1933년 히틀러가 이끄는 나치의 집권은 딕스의 그림이 곧 현실로 닦칠 것을 예고하는 신호였다. 딕스의 전쟁제단화는 폭이 4미터 8센티미터, 높이는 2미터 64센티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크기이다.
딕스는 자신이 본 진짜 전쟁을 그리기 위해서 화가들이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캔버스는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것이다. 딕스는 유럽의 기독교인들이 자주 보아왔던 제단화라는 형식을 빌려 전쟁을 증언한다. 제단화는 여러 컷의 그림으로 그려졌는데 성서의 내용들을 이야기 형식으로 그려 신도들에게 교훈을 주려는 의도로 만들어졌다. 신문의 만평처럼 컷이 나뉘어진 그림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예고하거나 예수의 기적을 말하거나 예언자의 가르침을 나타낸다. 이 제단화에도 암묵적 규칙이 있으니 가운데 그림은 아기예수를 안고 있는 성모마리아나 예수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가운데 그림이 양쪽그림과 아래쪽 그림을 수렴하는 형식이다. 이런 제단화들은 교회당 안 설교제단의 뒷벽이나 설교단 아래 등 교회나 수도원의 가장 잘 보이는 곳에 그려졌다. 딕스는 이 제단화의 양식을 전쟁에 대입했다.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목소리를 높이고 찬양하는 실체가 무엇인지, 그들이 숭배하고 미화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폭력을 정의라고 외치는 사람들이 만든 제단의 실체가 무엇인지 보여준다.
 
순환계처럼 어디서 시작하든 전쟁의 한 가운데로 들어갈 수 있다. 그 섬뜩함과 광기는 그림을 보는 이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시계방향으로 왼쪽부터 시작되는 그림은 우중충한 어둠속 병사들이 완전군장을 한 채 총을 들고 전선으로 향한다. 다른 전쟁화나 영화에서처럼 조국을 지킨다는 신념과 자랑스러움은 보이지 않고 곧 펼쳐질 지옥 속으로 떠나는 사람처럼 발걸음이 무겁다. 먼 하늘은 노을이 물들었는지 아니면 전쟁의 불길인지 불게 타오르고 있다. 병사들 중의 한 명은 1차대전에서 살인무기로 맹위를 떨쳤던 맥심 기관총을 등에 메고 있다. 유일하게 얼굴을 보인 병사의 표정은 도무지 알 수 없다. 병사들의 발은 안개에 가려져 보이지 않고 있다. 발이 없는 사람들. 마치 유령처럼 어디론가 끌려가는 병사들의 행렬은 암울하기만 하다. 병사들이 바로 옆에 비극적으로 펼쳐진 전쟁의 속으로 끌려들어가는 듯하다. 중앙의 그림은 다른 그림을 두 개 합친 크기다. 전쟁을 이 한 편의 그림으로 모두 말하고 있다. 대단하다. 1차대전의 모습인데 터미네이터라도 나올듯한 다가올 미래의 모습 같기도 하다. 중앙 왼쪽에 선명히 보이는 방독면을 쓴 병사는 일본의 애니메이션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에 나오는 병사처럼 철모와 망토를 쓰고 있다. 전쟁의 끔찍함을 고발해온 일본 최고의 애니메이션 감독 미야자키 하야오가 어쩌면 오토딕스의 그림을 보고 모티브를 얻었는지도 모르겠단 생각을 했다.
중앙화면의 가운데에는 토치카가 보인다. 지그재그의 요철모양으로 길게 이어진 참호 속에서 적을 쉽게 공격하거나 효과적인 방어를 위해 만들어진 토치카도 1차 대전의 작품이다. 토치가 너머에는 황량한 벌판과 무너진 건물들이 있다. 화면 오른쪽 거꾸로 누워 죽은 사람의 다리와 발에는 수십 발의 총탄자국이 나있다. 살은 하얗게 석고처럼 굳어있다. 그 아래 참호에 쓰러져있는 병사의 배에서는 내장이 시뻘겋게 흘러나와 있다. 왼쪽아래에는 시커멓게 타서 숯이 되어버린 철조망 지지막대가 있다. 철조망도 1차대전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물건이다. 제단화의 한 가운데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그린다면 당연히 가시 면류관이 그려지는데 이 철조망도 인류를 얽어매고 있는 가시 면류관처럼 검게 타버린 나무를 옭아매고 있다. 중앙 제단화의 왼쪽에는 하늘을 나는 듯한 이가 있다. 자세히 보면 산 사람이 아니고 옷은 다 찢겨지고 갈비뼈가 훤히 보이는 시체이다. 이 하늘을 나는 시체는 철제 빔 같은 곳에 몸이 끼워져 공중에 떠있고 한 손은 전선을 가리키며 돌격을 외치는 듯하다. 적을 향해 돌격을 외치는 몸짓이 얼마나 허황되고 거짓에 찬 죽음의 외침인지를 보여주려는 것이 아닐까?
오른쪽의 세 번째 그림은 불타는 전선에서 한 병사가 부상당한 동료 병사를 끌고 나오는 장면이다. 죽어가는 전우를 끌어안은 병사는 동료를 살려야겠다는 일념으로 이를 악물고 전장에서 빠져나오고 있다.
 
▲ 레마르크의 원작 소설을 영화화 한 <서부전선이상없다> 한 장면
레마르크의 소설 <서부전선 이상없다>의 막바지 부분에서 주인공 파울은 그가 최고로 좋아하는 친구인 카친스키가 부상당하자 넋을 놓고 부상당한 친구를 살리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한다. 파울의 생각은 응급 의료소까지 쉬지 않고 가는 것 뿐이었다. 재수 없는 상관을 골려주고 몰래  잡은 거위를 홈쳐 나눠먹고 온갖 전투에서 죽을 고비를 함께 넘기고 서로를 아꼈던 친구가 총상을 입자 파울은 어쩔 줄을 모른다. 파울은 카친스키를 업구 달리다 포탄공격에 잠시 포탄구덩이에서 숨을 돌리며 이야기 한다. “이봐 카친스키. 어떤 일이 있더라도 우린 다시 만나야 해. 네가 다시 돌아오기 전에 정말 평화가 오면 말야” 카친스키는 담배 한 개비만 달라고 말한다. 파울은 카친스키에게 주소를 가르쳐 달라고 하고 주소를 적은 쪽지를 가슴 속 주머니에 넣는다. 파울은 오토딕스의 그림처럼 카친스키를 부축해 옮긴다. “나는 그의 몸을 감아 올리고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의 다리가 너무 흔들거리지 않도록 느릿느릿 계속 발걸음을 옮긴다.” 마침내 의무대에 도착한 파울은 카친스키가 무사한 걸 보고 미소를 짓는데 위생병이 와서 말한다. “이런 수고를 할 필요가 없는데” 파울은 영문을 몰라 그 위생병을 바라보는데 위생병은 말을 잇는다. “그는 벌써 죽었어.” 사람들이 딕스의 그림을 레마르크 소설의 삽화라고 하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제단화 마지막 그림인 밑부분 그림에는 나무로 짜여진 곳에 사람들이 누워있다. 언뜻 보면 관 같기도 하다. 그러나 1차대전 당시 참호에는 쏟아져 내리는 진흙더미를 막고 휴식을 취하기 위해 이렇게 나무로 짜여진 공간을 만들어 놓기도 했었다. 결국 이것이 휴식인지 죽음인지 모르는 생과사의 구별이 없는 전장의 한 복판임을 암시하고 있다. 병사들이 참호를 새로 파다 보면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는 사체들에 진저리가 날 정도로 1차 대전의 전장은 시체들로 뒤덮였다. 결국 딕스는 전쟁 제단화를 통해서 전쟁이란 수많은 인간들을 죽음으로 인도해내는 광란의 순환궤도라는 것을 고발한다.
딕스는 전쟁을 정확히 정의한다.
 
“벼룩, 쥐, 철조망, 유탄, 폭탄, 구멍, 시체, 피, 포화, 술, 고양이, 독가스, 캐논포, 똥, 포탄, 박격포, 사격, 칼, 이것이 전쟁이다! 모두 악마의 짓이다!”
 
폐전을 이틀 앞둔 미술관의 관객은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냉방이 잘된 전시실에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 딕스가 증언하는 1차 세계대전의 모습을 보면서 딕스의 간절한 울림이 1920년대의 독일을 넘어 2010년의 이곳 한국에도 들리는 듯 했다. 우리 사회는 1차대전보다 더 끔찍한 전쟁을 겪었다. 군인과 민간인 할 것 없이 그저 무참히 죽어나갔다. 그렇게 전쟁을 겪고 나서 60년이 흘렀다. 이제 이 땅은 전쟁과는 먼 거리에 있는 걸까? 전쟁은 영화에서나 나오는 즐기는 무용담에 불과할 것인가? 얼마 전 회사에서 천안함 사건관련 논쟁이 한 참일 때 누군가의 입에서 충격적인 소리를 들었다. “전쟁은 나만 안 죽으면 재미있는거야!” 우스갯소리로 한 말이었겠지만 전쟁에 대한 지배자들의 생각이 만약 이렇다면 큰일이다. 더구나 우리 사회의 지도자들 상당수는 군대를 제대로 다녀오지도 않아 그 엄청난 폭력과 인간성 파괴의 실상을 경험할 틈도 없었다.  나만 안 죽으면, 전쟁으로 내 가장 사랑하는 아들, 딸들이 죽어나가는 것을 보는 것은 괜찮은가? 나만 안 죽으면, 내가 정찰나간 마을에서 부스럭 거리는 소리에 놀라 당긴 방아쇠에 숨어있던 7살짜리 소녀가 피를 벌겋게 흘리며 죽어가도 재미난 일인가? 전쟁은 영화가 아니고 모험도, 스펙타클도 아니다. 그냥 인간성을 끊임없이 파괴해나가는 과정일 뿐이다. 


우리 사회에 만연한 군사주의와 그것들을 닮은 소통방식을 볼 때 나는 숨이 막힌다. 아주 작은 발화점만 있다면 서로 잡아먹겠다고 으르렁거리는 이 사회를 치유할 방법은 정말 없단 말인가?
무거운 마음으로 미술관을 돌아 나오다가 미술관 한쪽 코너에서 작은 기획전이 열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 유대인의 폭력적 점령정책으로 고통받고 있는 팔레스타인과 중동을 대표하는 여러 영상작가들의 영화를 상영하고 있었다. 기획전 이름은 <치유의 몸짓>이었다. 미술관을 나가려다 그중의 두 작품을 보았다. 제법 큰 스크린 앞에 헤드폰을 끼고 홀로 앉아 화면을 응시했다. 이스라엘 시골의 어느 마을. 작은 마이크로버스가 장거리여행을 준비하고 그 마을의 여러 사람들이 각자의 사연을 안고 차에 오른다. 이때 검은 색 부르카를 입은 젊은 여성이 커다란 가방을 안고 타는데 웬일인지 갑자기 차안에 불안감이 조성되고 사람들이 버스에서 탈출하듯 허겁지겁 내리기 시작한다. 서로 자리를 차지하지 못해 다투던 사람들이 다음 차를 이용하겠다고 하고 또 일부는 부르카를 입은 여성을 끌어내라고 한다. 불신이 가득한 속에서 개인들로 보면 모두 선한 듯 보이는 사람들이 집단이 되어 광기에 휩쓸린다. 달려온 이스라엘 군인의 총구가 클로즈업된다. 부르카를 입은 여성은 집단의 공포 앞에서 그저 떠는 것 밖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결론은 운전기사의 설득으로 버스에 자리를 잡고 여행을 하게 되지만 불신의 장벽이 얼마나 인간을 황폐화 시키는지 보여주고 있는 영화였다.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폭력의 속안을 들여다보면 불신이라는 알을 가지고 있다. 이불신의 알은 탐욕이라는 재앙이 만들어낸 알이다. 사람이 어떻게 되든, 동물이 어떻게 되든, 자연이 어떻게 되든 거기에서 만약 이윤이 창출되면 그게 선이다. 창출되는 이윤은 아주 작은 사람들만이 향유한다. 이 과정에서 불신의 꽃은 전 세계를 덮는다. 이제 우리는 조금식 깨닫고 있다. 경제를 살리는 게 아니라 사람을 살리는 게 중요하다고.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두발을 딛고 있는 곳에서부터 행동해야 한다. 이 죽어가는 지구의 모든 생명체를 살리는 치유의 몸짓을 이제 시작해야 한다. 


미술관을 걸어 나오다 보니 입구에 ‘치유의 몸짓’전을 알리는 포스터가  붙어있었다. 포스터의 아가씨 얼굴이 낯이 익다 싶었더니 영화에서 부르카를 썼던 그 아가씨다. 그녀에게 평화를 비는 인사를 하고는 조금은 가벼운 마음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 지구 곳곳에서 적지 않은 사람들이 탐욕과 이윤을 넘는 노력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언뜻 보면 거대한 탐욕의 세력들이 토해내는 불덩어리가 너무 거세 과연 저항이나마 제대로 할 수 있을까 회의가 들기도 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 세상이 더 나아질 수 있다는 믿음을 버리지 않고 한걸음 한걸음 앞으로 나아가야한다. 우리가 사는 지금 여기 대한민국에서도 우리는 치유의 몸짓을 벌여야 한다. 파헤쳐지는 강 곳곳에서, 쫓겨나는 재개발 터에서, 힘으로 짓눌리는 노조무력화 현실에서, 인간성이 파괴되는 학교에서 행동해야 한다. 가난한 이들에게는 전쟁터와 다름없는 이 대한민국에서 인간이 살아있음을 보여줘야 한다. 다른 세상은 가능하다.
  

P.S
 
전쟁의 원고를 넘기고 난 뒤 서울소재 기관차지부의 연합노보발간으로 인한 원고 폭주로 게재가 미루어졌다. 그 후 노보발간이 지연되다가 연평도 포격사건이 터졌다. 이 땅에서 전쟁의 위협은 현재진행형임을 여실히 보여준 사건이었따. 포격사건이 터지자 포탄의 연기가 모든 것을 덮어버렸다. 청와대 대포폰 사건이나 현대 자동차의 비정규직 투쟁 등 사회적으로 중요한 사안들이 묻혀버렸다. 무능한 실체를 드러낸 군부는 오히려 예산과 병력을 늘리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 증오를 앞세와 한순간에 이성을 잠재운다. 입만 열면 인민을 외치며 사회주의를 참칭하는 북한의 반민중적 폭력정권과 그 수준을 못 넘어서는 남한의 수구세력이 목청 높여 외치는 대결 주장을 남북의 평범하고 순박한 사람들이 따라야 할 이유가 없다. 전쟁의 최악의 대안도 될 수 없다. 평화가 답이다. 오토딕스가 고발하는 전쟁의 실체를 외면하지 않고 똑똑히 보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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