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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nday, April 10, 2011

에로티시즘






박흥수 | 조합원
 
드디어 다른 영역에 들어왔다. 오늘의 주제는 모든 남성, 아니 모든 인류의 가장 큰 관심사인 에로티시즘이다. 이 글을 읽는 분들은 지금 잠시 눈을 감아 보시라. 햇살이 나른하게 창가의 커튼을 두드린다. 침대의 얇은 시트는 제멋대로 구겨진 채 알몸의 남녀를 반쯤 덮고 있다. 막 늦잠에서 깨어난 두 사람은 개구쟁이의 미소로 서로의 달짝지근한 살 내음을 맡는다. 아주 조금씩 장난치듯 서로의 몸을 쓰다듬던 손길은 심장의 고동이 다른 박자로 뛰기 시작하는 순간 점점 더 끈적거리고 거칠게 변한다. 아 얼마나 황홀하고 행복한 순간인가? 이제 침을 꿀꺽 삼키고 다음 이야기로 넘어가보자.



동물 중에서 한 단계 높은 지능을 가진 동물 중의 동물인 인간은 우주의 지상명령인 본능을 뛰어 넘었다. 종의 유지라는 본능을 뛰어넘는 순간 생기는 것이 바로 에로티시즘이다. 그러니까 에로티시즘은 본능을 포함하지만 본능 너머의 또 다른 세계까지 구현된 것이다. 인간들은 단순히 종의 유지를 위한 성적결합에서 탈출했다. 어쩌면 인간이 종의 유지를 위한 성적본능을 뛰어 넘은 것조차 이 우주의 움직임이 만들어낸 결과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인간이 동물성으로부터 떨어져 나오게 한 것은 무엇인가? 바로 노동이다. 동물이 인간이 된 것은 노동에 의해서다. 인식과 이성의 바탕이 된 것은 무엇보다 노동인 것이다. 프랑스의 인문학자 조르쥬 바따아유는 자신의 책 에로스의 눈물에서 노동에서 출발해 성에서 동물성을 탈피한 인간을 이야기 한다. “노동이 인간성의 기원이요 열쇠인 것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결국 인간이 동물성으로부터 크게 벗어나기 위한 출발점일 뿐이다. 인간이 동물성에서 크게 벗어난 것은 특히 성생활의 차원에서다”(에로스의 눈물 38P)
바따아유에 따르면 암컷을 찾아 덮치는 수컷의 행동은 다만 본능 충동에 반응하는 것일 뿐이지만 노동을 통해 이미 목적의 인식이 가능해진 인간들은 순수한 본능적 반응으로부터 통상 멀어져 갔다고 한다. 성적 활동의 목적을 의식한 최초의 인간들은 성적 활동의 목적이 아기의 탄생이 아니라 성적 활동으로부터 비롯되는 즉각적 쾌감이었다. 인간적 차원에서 볼 때, 연인들의 결합 혹은 부부의 결합은 우선 오직 한 가지 의미, 즉 에로틱한 욕망의 의미만을 가졌다.(에로스의 눈물, p40) 여기가 바로 에로티시즘의 출발점이다. 동물의 성적 충동과는 다르게 노동과 마찬가지로 목적의식적 추구라는 공통테제는 인류의 역사와 함께한다.
오래전 원시시대에도 사람들은 마음속에 그리던 것을 그렸다. 사냥하는 모습, 밥을 먹는 모습, 자연의 모습 등 수많은 그림을 그렸지만 그 중에 빠지지 않는 것이 뽀르노그라피였다. 종족의 번영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그려지기도 했지만 예술 행위이기 전에 손으로 하는 노동으로서의 그림이나 조각으로 에로티시즘을 구현했다. 인간은 노동을 통해서 새로운 전진을 이루어냈고 이 노동의 근간이 된 것은 도구였다. 여기 도구가 하나 있다고 치자. 만약 누군가 이 도구를 만들었다면 이 도구를 만드는 과정에서 이미 도구를 통해 만들어낼 대상도 인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무엇을 만들 건지도 모른 채 도구를 만들 순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노동도 마찬가지다. 내가 하는 구체적인 노동행위의 원인과 결과가 반드시 존재한다. 인간이 뽀르노그라피를 만드는 노동을 했다는 것은 그것을 통한 욕망의 실현이라는 자기 목적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구석기 말기의 유럽에서 뛰어난 동굴미술을 보여주는 그림이 있다. 마들렌드 문화기라고 칭하는 수십만 년 전의 인류는 알타미라 동굴에 거대하게 발기된 남근을 가진 인물이 웃고 있는 그림을 남겼다. 환희에 가득 찬 남성이 거대하게 발기된 자신의 남근을 보고 있다. 이런 그림은 구석기 시대부터 오늘날 전 세계 중고등학교 및 군부대 화장실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우리의 욕망을 표현해주고 있다.
우리가 인간임을 증명해주는 알리바이는 노동과 성이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인류의 역사에서는 이 두 가지를 혐오하거나 업신여기는 역사가 이어져왔다. 특히 권력을 장악한 사람들은 노동에서 해방되어 성을 마음껏 향유할 수 있는 자유를 누리게 되었다. 이 자유를 독점하거나 통제하기 위해서 성은 어둡고 음침하고 불쾌한 것이 되어야 했으며 그 족쇄는 대다수 노동하는 자들의 몫으로 채워졌다. 종교권력은 성을 죄악시하여 인간이 끊임없는 도덕적 원죄의식에 시달리게 했고-중세에는 자위를 했다는 이유로 목숨을 잃는 경우도 있었다-이것은 정치권력이 노동력을 제공하는 인간(노예, 농노)들에 대한 통치를 수월하게 하는 데 일조했다.
맑스는 인간의 역사가 계급투쟁의 역사라고 했지만 그 내면의 모습은 노동의 족쇄와 성의 족쇄에서 해방되어 나가는 과정이었다. 자본주의시대가 열리면서 비로소 인간은 형식적이나마 인격적 자유를 획득한다. 그 누구도 법률적으로 다른 인간의 부속물이 되진 않는 것이다. 그러나 이 자유는 잠시 유보된다. 세상에서 먹고 살려면 내 노동을 시장에 내다 팔아야 하기 때문이다. 노동시장에 내 던져진 이상 실업자가 되거나 노동자가 되거나 둘 중의 하나 밖에 없다. 노동에서 해방된 사람인 자본가들은 노동자를 예비실업자로 여기고 노동시장의 자유인들은 실업자를 예비노동자로 여긴다. 노동을 팔 자유밖에 없는 허울뿐인 자유인들은 에로티시즘에서부터도 밀려나 사회의 가장 밑바닥에서 퀭한 눈을 굴릴 뿐이다. 에로티시즘적 에너지의 확산은 기존 질서의 전복에서, 새로운 희망을 여는 과정에서 일어난다. 그 이유는 인간다움을 이야기 할 수 있는 근거가 노동과 성인데 이것들은 강제나 감시 속에서는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화가들은 에로틱한 그림을 그릴 때면 자기검열부터 시작했다. 자기 작품이 추기경한테 불태워지진 않을까? 혹시 불태워지는 게 작품이 아니라 자신이라면? 그래서 화가들은 정말 그리고 싶은 옆집 젊은 여인 대신 신화나 성경에 나오는 인물을 그렸다. 신화의 여신들은 왜 그랬는지 거의 옷을 입지 않았다. 성경에 나오는 장면도 심증은 가지만 물증을 낼 수 없는 정도의 수준으로 야하게 그렸다. 아기예수에게 젖을 물리는 마리아를 육감적으로 그려내는 식이다. 1865년 에두아르 마네는 파리 살롱전에 알몸의 여인이 누워있는 <올랭피아>라는 그림을 출품했다. 300년 전 이탈리아 화가 티치아노의 <우르비노의 비너스>를 차용해서 그린 그림이었는데 엄청난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사람들은 방망이를 들고 그림을 부수겠다고 몰려들었다. 완전한 알몸은 신화나 성경의 모습으로 나타나야하는데 <올랭피아>에서는 사창가에서 이름난 창녀인 빅토린 뫼랑이 당당하게 누워있는 것이었다. 비너스가 아니라 창녀라니!

티치아노의 우르비노의 비너스
올랭피아

사람들은 분노를 참지 못했고 마네에 대한 비난은 하늘을 찔렀다. 그러나 <올랭피아>의 그림은 이렇게 분노하는 사람들에게 그려진듯 아주 당당하게 말을 한다. 여인은 상반신을 침대배게에 기댄채 발을 쭉 피고 누워있다. 그리고 아주 거만하게 오른팔로 몸을 지탱하고 왼손으로는 국부를 가렸다. 아니 가렸다기보다 손을 올려놓았다. 가슴은 중력의 영향으로 자연스럽게 활짝 열려있다. 게다가 시선은 관람자를 보고 있다. 알몸을 부끄러워하는게 아니라 도발적으로 상대에게 말을 걸고 있다. 그녀의 입은 굳게 다물어져 있지만 백마디도 더 말하는 것 같다. 목에 맨 리본과 머리에 달린 꽃은 이 여인의 내공이 예사롭지 않은 인물이란 것을 보여준다. 눈은 똑똑히 뜨고 입을 굳게 다문 채 말한다. “위선자들!”


세계의 근원
  
 
에로티시즘에 관련한 원고를 써야겠다는 계기는 바로 지금 소개하는 그림을 보고난 뒤였다.
칼릴베이는 터기대사였다. 평소 화가 쿠르베의 능력을 알고 있던 칼릴베이는 쿠르베를 찾아 끝내주는 것을 그려달라고 부탁했다. 쿠르베는 알겠다고 답을 했다. 칼릴베이는 쿠르베가 자신을 만족시키리라는 것을 알고 흔쾌히 작품을 기다렸다. 그리고 작품이 완성된 뒤에는 칼릴베이가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굉장한 작품에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쿠르베는 누구인가? 1819년에 태어나 고향인 브장송에서 자라는 동안에는 그림교육을 못 받고 뒤늦게 르브르 박물관의 작품들을 따라 그리며 독학으로 그림을 배웠다. 쿠르베는 연출된 포즈를 취하는 그림을 그리기 보다는 사람들의 삶을 날것으로 그렸다. 밀레와 더불어 육체노동을 하는 서민들을 그린 최초의 화가였다. 노동자의 굵은 힘줄, 불결함, 거친 땀을 가감없이 화폭에 옮긴 쿠르베는 그런 이유 때문에 파리살롱의 공개적인 비난을 받기도 했다. 쿠르베에게 영향을 끼친 것  은 프랑스혁명이었다. 구체제에 대항한 파리시민들의 봉기는 쿠르베의 가슴에 커다란 울림을 주었고 이후 한 시대를 풍미했던 낭만주의나 고전주의를 멀리했다. 그는 스스로 자신의 스타일을 리얼리즘이라 불렀고 이 용어는 나중에 전 세계적인 공인을 받게 된다. 오늘날에도 파리시민들 중에는 신용카드 등의 비밀번호를 1871로 쓰는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 1871은 프랑스 대혁명의 기나긴 과정 중 막바지 단계인 파리꼬뮌이 수립되었던 해를 기념하기 위해서다. 1848년 불타오른 혁명의 불길은 전진과 후퇴를 반복했다. 1871년 프랑스의 제2제정이 프로이센과의 전쟁에 패한 뒤 파리를 장악한 시민들은 혁명자치정부를 세운다. 바로 파리꼬뮌이었다. 이 파리꼬뮌에서 쿠르베는 예술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 우리나라로 말하자면 광주항쟁당시 시민군 지도부에 참여한 격이었을까? 파리꼬뮌은 시민들의 자율적 봉사와 헌신으로 평등한 공동체를 만들었고 각종 위원회가 역할을 분담하여 그야말로 프랑스의 혁명정신인 자유, 평등, 연대의 가치가 샘솟는 공간으로 탈바꿈 했다. 이런 분위기에 위협을 느낀 프랑스의 부자들은 적국인 프로이센 군대를 불러들여 진압작전을 펼친다. 파리 곳곳의 바리케이트에 불이 붙고 수많은 시민군들은 죽음을 각오하고 혁명을 지키기 위해 프랑스 부르조아지와 프로이센 연합군에 맞선다. 몽마르트언덕에 시민군의 시체가 쌓이고 파리의 거리 여기저기에서 압도적인 화력에 밀린 시민군들이 패퇴한다. 파리꼬뮌이 무너지고 쿠르베는 감옥에 투옥되었다. 광장에 서 있는 나폴레옹기념탑을 파괴했다는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고 엄청난 벌금을 부과받았다. 쿠르베는 이 벌금을 낼 이유가 없다며 스위스로 도망갔고 몇 년을 더 살다가 죽음을 맞았다.
쿠르베는 자유로운 인간이었다. 폼 잡는 그림보다는 사실에 근거한 그림을 그렸고 적지 않은 애인과 사랑을 나눴으며 혁명에 누구보다도 열정적으로 참여했다. 그의 애인이었던 아일랜드 출신 히피넌이란 여자는 동성애를 했지만 전혀 문제 삼지 않았다. 그는 칸트의 말을 흉내내 자연스러운 것은 모두 아름답고, 아름다운 것은 모두 자연스럽다며 애인의 동성애도 그대로 인정했다. 200년도 전의 사람이 오늘날을 사는 우리보다 훨씬 자유로운 영혼을 가지고 있었고 그런 삶의 방식을 몸소 보여주었다. 이제 쿠르베의 <세계의 근원>을 감상하러 가자.
K는 사랑하는 애인과 밤을 지세는 게 너무 행복했다. 힘든 일과 속에서도 그녀를 만나 밥을 먹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삶의 유일한 즐거움이다. 게다가 새로 이사한 오피스텔은 새 건물이라 모든 시스템이 산뜻하다. 애인이 찾아올 때마다 와인 잔을 들고 야경이 펼쳐진 오피스텔창밖의 거리를 함께 보는 것은 색다른 행복이다. 은은한 조명이 비추는 침대는 더 환상적이다. 그러던 어느 날 여느 때처럼 둘은 잠을 잤다. 얼마나 잤을까? 잠시 목마름에 몸을 일으킨 K는 물을 마시고 와서는 옆에 잠들어있는 애인의 얼굴을 보며 미소 짓다가 갑자기 무슨 생각이 났는지 몸을 벌떡 일으켜 테이블로 걸어간다. 테이블위에는 새로 산 DSLR카메라가 놓여있다. K는 카메라를 들고는 전원버튼을 켰다. 그리고는 애인이 누워있는 침대로 다가가 다리를 덮고 있는 시트를 살짝 들춰낸다. 그의 애인은 잠이 들면 무슨 일을 해도 모르는 타입이다. 조심스레 다리를 벌려놓고 당당하게 렌즈를 다리사이로 들이댄다. 모든 남자의 로망이 실현되는 순간이다. 철컥, 철커덕 셔터음이 고요한 새벽공기를 가르고 K는 몇 번이고 침을 삼키면서 심오한 예술가가 되어 그녀의 다리 사이를 메모리에 담는다.
위의 가상적인 상황의 결과물처럼 <세계의 근원>은 만들어졌다. 일반적인 누드는 사람 몸의 전체를 담는다. 부분을 담는다 해도 몸의 상당부분이 그림 속에 들어가 있다. 또한 모델이 누구인지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세계의 근원>은 오로지 여성의 성기만을 보여주고 있다. 시트에 가려진 가슴 밑부분부터 배와 성기를 지나 항문까지 이어지는 완벽하게 재현된 여성의 가장 중요한 그 부분이다. 쿠르베의 생존시절 사진기가 발명되었긴 했지만 원판에 은염촬영방식의 고전적 방법이었고 촬영기법 같은 것이 오늘날의 그것과는 천지차이다. 그러나 쿠르베의 그림은 현대의 사진작가들이 사용하는 크롭기법을 대담하게 회화에 적용시켰다. 대담한 생략과 절제, 대상의 강조는 크롭기법이 보여줄 수 있는 중요한 요소이다. 이런 현대적 감각을 회화에 적용시켰다는 것은 쿠르베가 그만큼 혁신적인 날라리였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사회주의 이론가인 프루동의 친구이며 동성애자의 애인이며 리얼리즘의 선구자이며 혁명의 지도자이자 에로화의 대가! 쿠르베가 가진 다양한 이력의 배경에는 무한한 상상력과 자유가 있다.
 
칼릴베이는 집에다 그림을 걸어놓고는 같은 크기의 설경 그림을 그 위에 덫 걸어 친한 친구들을 초대했을 때만 감춰진 그림을 보여줬다고 한다. 칼릴베이는 친구들이 입을 벌리고 눈을 크게 뜬 채 놀라는 표정을 보는 재미로 이 그림을 소장하지 않았을까?
이 그림은 부다페스트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가 2차대전이 일어난 뒤 나치에 의해서 압수되었다. 전쟁이 끝난 뒤엔 승전국인 소련으로 넘어갔다가 1955년 철학자 자크 라캉의 손에 들어오게 되고 들뢰즈에게까지 왔다가 1981년 라캉의 죽음 이후 프랑스 정부에 기증형식으로 환수된다. 들뢰즈가 소장할 때에도 들뢰즈의 부인이 앙드레 마송이란 화가에게 덮개그림을 주문하여 마송의 그림 아래 숨겨두었다고 한다.
90년대 한국. 현실사회주의가 몰락하고 적지 않은 사람들이 꿈꿔왔던 사회변혁에 대한 상이 혼란을 겪으면서 한 시대를 풍미했던 맑스주의가 썰물처럼 물러갔다. 아예 변혁에 대한 기대를 저버리거나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는 이도 많았다. 모두 혼란에 빠졌고 신자유주의의 바다 속으로 막연한 희망이라는 구명조끼 하나만 믿고 뛰어들었다. 그런 와중에 새로운 철학적 화두를 던져주는 사람들이 있었으니 푸코, 라캉, 기타리, 들뢰즈였다. 욕망하는 기계로서의 인간이라는 화두를 던져놓고 우리가 진정 목말라하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해 반복적인 질문을 하게 했던 철학자들이었다. 일부는 환호했고 일부는 무시했으며 일부는 의심했지만 그것들과 상관없이 세상은 신자유주의의 쓰나미에 속수무책이었다. 대안이 없어 보이는 이 세상에서 그래도 끊임없이 돌파구를 찾아 떠나라는 들뢰즈의 충고는 충분히 가치가 있는 것이었다. 들뢰즈는 왜 <세계의 근원>을 손에 넣었을까? 들뢰즈는 1925년생이다. 엔지니어인 아버지의 둘째아들로 태어나 평범한 소년으로 자라난다. 어느 가정이나 동생은 형이나 언니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들뢰즈는 좋아했던 형의 부재로 소년시절 큰 충격을 받는다. 형은 독일군이 프랑스를 점령하자 레지스탕스활동에 참여한다. 점령군하에서의 독립운동은 어디에서나 그렇듯이 목숨을 걸 수밖에 없는 행위였다. 들뢰즈의 형은 비밀경찰에 체포되어 수감되었고 고문과 투옥을 거쳐 아우슈비츠로 향하는 기차에서 생을 마감한다. 파시즘과 전쟁의 거대한 소용돌이가 삶을 뒤덮고 희망이라곤 보이지 않는 절망의 한 가운데에서 가장 가까운 혈육이자 친구였던 형이 거대한 악에 몸을 던져 산화해갔다. 아마도 형의 죽음은 들뢰즈에게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에 대해 커다란 울림을 주었을 게 분명했다. 들뢰즈는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성공해 프랑스가 해방되던 1944년에 소르본대학 철학과에 등록하고 흄을 연구해 학위를 받는다. 48년 철학교수 자격을 획득한 후 아미앵, 오를레앙, 파리에서의 고등학교 교사생활을 거쳐 57년 소르본대 철학사 조교가 되고 68혁명이후인 69년 혁명의 여파로 대학 서열이 무너지고 평준화된 파리의 8대학교수로 임명된다. 이 곳에서 죽을 때까지 우정을 나누는 친구인 펠릭스 기타리를 만난다. 기타리와 함께 감옥 정보 그룹이라는 우스운 이름의 모임을 만들고 푸코와 공동으로 연구활동을 수행한다.


전쟁의 근원

쿠르베의 세계의 근원은 많은 미술가들에 영향을 주었고 다양한 모사나 패러디를 뒤따르게 했다. <전쟁의 근원>은 프랑스의 페미니스트 여성화가 오를랑이 1989년에 <세계의 근원>을 패러디해서 만든 작품이다.
들뢰즈는 영혼과 육체의 자유로운 방랑을 이야기 하지만 실제로는 여행을 별로 하지 않았다. 19685월 혁명을 지지했지만 공산당에 가입한 적도 없다. 하지만 맑스주의를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92년 영원한 우정 기타리가 죽고 3년이 지난 9511월 파리근교의 아파트 창문으로 몸을 던져 생을 마감한다. 방대한 저작과 끊임없는 지적 탐구, 영화 등 문화예술에 대한 탁월한 상상력. 현실문제에 대한 열정적인 문제제기, 강의와 집필에 바친 생애. 들뢰즈는 어쩌면 쿠르베처럼 자유로운 영혼을 마음껏 향유하는 인생을 살았다. 그런 호기심 많고 특출난 사람이라면 충분히 세계의 근원을 소장할 만하지 않았을까? 로맹롤랑은 상처받지 않은 영혼은 없다고 했다. 아무리 밝고 걱정 없이 보이는 사람일지라도 내면의 세계에는 저마다의 상처를 하나 둘씩 가지고 사는 게 인간의 숙명이라는 것이다. 들뢰즈는 자유로운 유목민이었다. 언제든지 어디든지 떠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집안에 부적처럼 걸려있는 세계의 근원은 들뢰즈의 상상력을 언제나 충만한 상태로 유지시켜주는 근원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실제로는 몸을 움직이지 않았다. 제대로 여행 한 번 해보지 않았다. 그의 내면에 깊이 박혀있는 트라우마가 그의 발목을 잡지 않았을까? 기차를 타고 아우슈비츠로 떠난 형이 언젠가 돌아오지는 않을까라는 내면의 상처가 그의 몸을 잡았던 것이 아닐까? 들뢰즈는 몸은 떠나지 않는 대신 세계의 근원이라 불리는 구멍 속으로 가상의 여행을 했던 시뮬레이터 트레블러가 아니었을까?
<세계의 근원>은 지금 파리의 오르세 박물관에 소장된 가장 대표적인 작품 중의 하나이다. 어떤 인간이더라도 반드시 통과해야만 하는 구멍. 그 포탈을 단도직입적으로 보여주며 쿠르베나 들뢰즈는 말을 건다. 너희가 자유롭고 싶은가? 공동체를 상상하라! 폭력이 지배하지 않는 공동체. 존레논이 부른 이매진의 가사처럼 샘솟는 폭력의 근원이 되는 종교, 국가, 소유가 사라진 공동체. 그리고 꿈을 억압하는 모든 것에 저항하라!
 
만국의 날라리들이여 단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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