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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nday, April 10, 2011

'얼굴들'에게 보내는 새벽 편지





정창식 | 조합원
 
며칠째 코를 훌쩍이던 아들 녀석 탓인지, 이틀을 연속해서 밤 승무를 한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몸이 무겁고 콧물이 계속 나온다. 유난히도 춥던 지난겨울 동안에도 걸리지 않던 감기가 봄은 그냥 갖는 게 아니라는 듯 그렇게 찾아왔다.
고요. 이른 아침부터 장난감 권총을 들고 설치던 아들이 학교를 가며 놓고 간 고요가 고맙다. 창밖으로 바싹 마른 상수리나뭇잎들의 곡예비행을 구경하다 삽을 찾아들고 마당으로 나선다. 삽질이 수월한 게 완연하게 녹은 땅의 부드러움이 느껴진다. 이미 땅속에는 봄이 찾아들어 있었다. 화단가에 벽돌을 세우고, 계분을 뿌린 흙을 뒤섞으며 겨우내 입가를 맴돌던 싯구절 하나 들춰본다.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곽재구, 사평역에서
 

 
지난주에 지부출범식이 있었다. 여럿이 모여들어 고사를 지내며 지부장의 재미난 축문에 웃기도 하고, 반가운 얼굴들을 마주하기도 하고, 몇몇 얼굴에 대한 그리움에 관해 이야길 나누었다. 그리고 무거운 출발을 하고 있는 얼굴들과 부끄러운 건배를 했었다.
땅을 파며 땀을 좀 흘리고 나니 몸이 한결 가벼워진 듯하다.
내친김에 동네 화원에서 패랭이며 수선화 몇 뿌리를 사다 심어 본다. 아직도 화단은 휑하다. 화단의 빈 곳들은 지난 가을 아내가 틈틈이 모으던 들꽃들로 채워야겠다.
그리고 파종을 마치면 얼굴들에게 새벽 편지한통을 보내야겠다.
 
 
 
새벽 편지
 
새벽에 깨어나 
반짝이는 별을 보고 있으면 
이 세상 깊은 어디에 마르지 않는 
사랑의 샘 하나 출렁이고 있을 것만 같다 
고통과 쓰라림과 목마름의 정령들은 잠들고 
눈시울이 붉어진 인간의 혼들만 깜박이는 
아무도 모르는 고요한 그 시각에 
아름다움은 새벽의 창을 열고 
우리들 가슴의 깊숙한 뜨거움과 만난다 
다시 고통하는 법을 익히기 시작해야겠다 
이제 밝아올 아침의 자유로운 새소리를 듣기 위하여
따스한 햇살과 바람과 라일락 꽃향기를 맡기 위하여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를 사랑한다는 한마디 
새벽 편지를 쓰기 위하여
새벽에 깨어나 
반짝이는 별을 보고 있으면 
이 세상 깊은 어디에 마르지 않는 
희망의 샘 하나 출렁이고 있을 것만 같다.
 
곽재구. 새벽 편지,한국의 연인들전예원,1986.



곽재구
1954년 광주광역시 출생. 1981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사평역에서당선. ‘오월시동인. 1992년 신동엽 창작기금과 1996년 동서문학상 수상. 사평역에서, 전장포 아리랑, 한국의 연인들, 서울 세노야, 참 맑은 물살등의 시집과 산문집 내가 사랑한 사람, 내가 사랑한 세상, 장편동화 아기 참새 찌꾸등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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